자동차 사업 창업기

부흥

부흥

~시대의 풍파를 극복하여, 자주개발로~

끊임없는 연구와 창조

기이치로는 자동차 사업의 확립에 매진하는 한편, 「자조 노력을 통한 독자적인 기술 개발이 공업의 발전을 촉진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연구와 창조가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도쿄 시바우라에 연구소를 설립. 그곳에서는 자동차 관련 분야뿐만 아니라 강한 관심이 있었던 항공기, 전시 체제 시에는 휘발유를 대체하는 대체 연료의 연구 등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기이치로의 연구에 대한 생각이 축전지 연구소, 도요타 이화학연구소, 그리고 1960년에 설립된 도요타 중앙연구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시 체제에서의 기술 개발과 생산 부문의 정비 확충

전쟁이 시작되고 자동차의 생산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되는 가운데, 기이치로는 다시 자동차 생산이 허용되는 때가 올 것에 대비하여 자동차의 프로토타입 연구를 계속합니다.

그 후, 국가에 의한 경제 통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군으로부터 요청받은 트럭 생산에 빼놓을 수 없는 철강재와 공작 기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당시 정해진 법령에 따라 「제강 부문」과 「공작 기계 부문」 분리 독립시킴으로써 도요타제강㈜(현 아이치제강㈜)과 도요타공기㈜(현 ㈜제이텍트)가 탄생했습니다.

전후의 신규 사업 모색과 자동차 사업의 부흥

종전 직후, 기이치로는 자동차 사업을 계속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종업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의식주에 관한 신규 사업을 모색합니다. 이 중에서 재봉틀과 기성 콘크리트 주택이 현재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 후, 자동차 생산이 허용되자 기이치로는 회사의 재건과 사업의 부흥을 위해 「전장 부문」, 「고무 부문」, 「차체 부문」을 독립. 각각 「일본전장㈜(현 ㈜덴소)」, 「도요타합성㈜」, 「도요타차체㈜」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영 위기 극복부터 순수 국산 기술을 통한 승용차의 개발

전후의 불황 속에서 도요타자동차공업㈜은 경영 위기에 직면합니다. 따라서 경영진은 은행의 융자를 받아 회사의 도산을 피함과 동시에 판매 부문을 분리, 독립시키는 등 회사의 재건을 도모하지만, 성과는 전혀 회복되지 않고 마침내 인원 정리를 놓고 노사가 대립, 2개월에 걸친 노동 쟁의에 돌입합니다.

그 결과, 기이치로는 책임을 지고 사장을 사임하기에 이릅니다만, 직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트럭을 대량으로 수주함으로써 실적은 빠르게 회복.

그런데, 기이치로의 사장 복귀가 결정된 직후, 그는 병으로 57세의 생애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기이치로의 「순수 국산 자동차를 만든다」라는 유지는 그 후에도 후배들에게 계승되어 3년 후인 1955년에 「도요페트 크라운」으로 설립되었습니다.